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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늦도록 바위돌에 눌린 것처럼 녹초가 되어 누워있는데
거실에서는 준형이와 지윤이가 무슨 놀이를 하는지 쿵쾅쿵쾅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소란을 떨어대고
할머니는 ’할아버지 주무시는데 조용히들 하라’고 야단을 치는지 달래는지 등달아 시끄럽고.....
며느리가 요즘 지쳐서 피곤해 하더라면서 좀 쉬라고 시어머니가 어제 가서 애들을 대려왔단다.
요즘 컴퓨터에 들어가 보면 ’나이 든 부모가 자식한테 재산 넘겨 주고 나서 용돈 타 쓰거나
손자 손녀 돌봐준다고 가뜩이나 쇠약해진 늙은 몸을 해치는 멍청이(?)들은 늙어서 고생한다’고 하던데....
오면 좋고 가면 더 좋다는 손자 손녀 돌보기에는 우리내외도 예외가 아니다.
집사람은 몸이 약한데도 준형이가 오면 신이 나 하고 가고 나면 파김치가 된다.
그래도 좋단다.
할머니가 준형이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준형아 ! 오늘 할아버지하고 슬기봉 올라갔다 올래?"
잠결에도 궁금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뜸들이지 않고 대답한다.
"네"
난감했다.
그러면서 준형이 녀석이 할머니에게 한다는 말이
’슬기봉을 오르고 부터 줄넘기를 훨씬 더 잘하게 되었다’나.
어제 선자령을 다녀왔으니 오늘은 좀 쉬어야 피로도 풀리고 리듬도 찾는데 또 슬기봉을 오르라니.....
저러다가 잊어버리겠지,
오전을 어물쩡 넘기다 보면 오후에는 애비가 애들을 데리러 올테고 그러다 보면 못 올라갈테고.
잔머리를 요리조리 굴리며 못 들은 척 모르는 척 했다.
늦은 아침을 먹고는 다시 누워 있는데 거실에서는 할머니 준형이 지윤이가 산에 간다고
옷들을 챙겨 입느라 부산을 떠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윽고 할머니가 통첩을 해왔다.
’준형이 데리고 슬기봉 올라 갔다 오세요. 자기는 지윤이 데리고 산기슭 약수터 근처에서 기다리겠다’고.
순간 여러 생각이 교차했지만 손자가 원한다니 달리 방도가 없었다.
준형이가 한 수 더 떴다.
"할아버지, 수리산에 봉우리가 몇개예요?"
"네개지, 슬기봉 태을봉 수암봉 감투봉."
"어느 것이 제일 높아요?"
"태을봉이지."
"그럼 오늘 태을봉 가요."
참 기가 막혔다.
왜 하필이면 몸이 피곤해 가고 싶지 않는 오늘, 태을봉엘 가자는 건가?
어린 손자에게 차마 말은 못하겠고.....
그렇지,
태을봉을 갈려면 슬기봉을 거쳐야 하는데 ’가다가 지칠 수도 있겠지’ 실날같은 기대를 하면서 집을 나섰다.
슬기봉을 올랐다.
세 번 째라선지 별 어려움 없이 오른다.
태을봉이 어디냐고 묻는다.
가슴이 철렁했다.
건너편 높은 봉우리를 가리켰더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듯 했다.
’야단났구나’ 했다.
그러나 어쩌나, 가야지.
슬기봉에서 태을봉으로 갈려면 능선을 따라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가야하는데
하늘이 도와선지 슬기봉을 내려가는 내리막길에 눈쌓인 얼음이 제법 미끄러웠다.
미끌미끌 미끌어지면서 준형이 혼줄이 빠져버렸다.
"할아버지, 얼마나 더 가야하나요?"
"되돌아가면 않돼요?"
바로 이때다.
이때를 기다려온 나다.
젊잖게 한마디 했다.
"준형아 !
오늘은 여기서 내려가고 이번 가을에 엄마 아빠 지윤이랑 함께 우리 태을봉에 올라가자."
혼줄이 빠진 준형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선선히 그러잔다.
산 좋아 하는 내가 어린 손자녀석에게 휘둘리다니...
"휴 !"
금년에 초등학교 2학년 올라가는 녀석이 동생하고 싸우는 걸 보면 너무 철 없어 보이고
밥 안 먹고 깡 마른 체구를 볼짝시면 허약하게만 보이는데 산을 함께 올라보니 왜 이리 대견스러운지..
봄 방학이라 오늘도 하루 더 붙잡아 두고 내일 보낸단다.
지금도 셋이서 숨바꼭질놀이 한다고 시끄럽다.
어제는 60산우회 친구들과 백두대간 선자령(1157m)을 다녀왔다.
흰눈 덮인 선자령을 상상하고 갔는데 눈은 녹고 비가 와서 온통 진흙탕이었다.
그러나 날씨는 좋아 봄이 온듯 했고 풍력발전 하는 풍차가 바람에 돌아가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건너편으로 바라다 보이는 용평스키장의 눈 덮인 스로프가 마음을 설레이게 했다.
작년에 이어 금년에도 스키장을 찾지 못했으니 이러다가 영영 SKI를 못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자령 등산길에서 옛날 다니던 회사의 친구를 우연히 정말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내려오고 나는 올라가고.
그곳 알펜시아현장을 맡아 있다고 했다.
그친구 이야기가 ’오늘 회사에서는 태백산에 올라갔다’고 했다.
회사는 매년 이맘 때 전사산행을 해서 태백산 천재단에서 시산제를 올린다.
눈에 선하다.
매년 태백산을 올랐는데 내려올때는 비료포대나 비닐을 깔고 앉아 미끄럼을 타는 재미가 일품이었다.
명색이 사장이란 사람이 애들처럼 미끄럼을 탄다고 껍쩍댔으니.... 그것도 앞장을 서서.
나이 생각은 않고 그러다가 어느 해, 발목이 뿌러져 깁스를 했던 일도 있지만 말이다.
즐거운 추억이다.
언제 준형이와 태백산을 함께 올라 비료포대 깔고 미끄럼을 탈 수 있으려나.
녀석, 겁이 많아 탈려고나 할지.
준형이가 슬기봉 올라가는 걸 보나, 지 애비 애미가 준형이 자랑을 늘어놓는 걸 보면
앞으로 준형이가 한 가락 할 것도 같다만.
아무렴 그렇게 돼야지.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
이게 무슨 말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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