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물소리마저 잠들어 버린 개울을 따라 치달아 걸었다.
개울 끝을 쫓으면 고개가 있겠고 고개에 오르면 사방을 식별하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산은 잠들어 있었다.
태곳적 정적이 원시림 사이사이를 누비고 있을 뿐 환절기라 북풍도 남풍도 없었다.
오직 무덤 속의 고요가 있을 뿐이었다.
#
나는 거목에 기대앉아 비탈의 백설을 적의와 원성이 서린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내가 걸친 낡은 누더기는 애초의 잿빛이 바래서 겨울을 지낸 눈빛과 다름이 없었다.
옷에 눈이 묻었는지 눈에 옷이 묻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동종집합同種集合이요 이종이산異種離散이기에 백설이 친절히 나를 포용하려 했나 보다.
#
"토굴이니까요, 이해하시겠지요?"
"토굴이라는 명색에 충실하기 위해 흙벽에 옷을 입히진 않았단 말씀이군요."
"지허당, 존재는 모두가 자기 나름의 속성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오.
그대로 두고 봐야지요.
여기는 토굴이고 우리는 유일자도 조물자도 아니니 말입니다."
"석우당, 인간이란 저 흙과는 별개의 것이 아닐까요?
존재라는 의미에서는 동일하겠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이질적이 아닐까요?"
"존재란 어떤 의미와 또 어떤 내용을 가졌는데요?"
"존재의 의미는 ’던져진 것’입니다.
인간이란 저 흙과 마찬가지로 자연에서 던져졌지만 저 흙과는 달리 자연을 이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끝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도 바로 인간입니다."
"극히 자연주의적이군요."
"지허당, 자연주의가 아닙니다.
다만 현재의 나로서는 인간을 정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의하는 순간, 인간은 벌써 비인간이 되고 말더군요.
일체만유一切萬有는 본체의 무한한 변화작용에 의해 사람도 되고 물物이 되기도 하는데 그 과정에서 보면 우연한 현상에 불과합니다.
#
여기저기에 산짐승들의 발자국이 무수하였다.
어떤 것은 처연했고 어떤 것은 분연했다.
처연悽然한 것은 쫓기는 쪽이요, 분연奮然한 것은 쫓는 쪽이었으리라 생각되니 내 스스로의 발자국을 뒤돌아보게 됐다.
그러나 나의 발자국은 찾을 길이 없었다.
나는 정확히 석우당의 발자국을 쫓았기 때문이었다.
의미 있는 고소苦笑를 금치 못하면서 여전히 석우당의 발자국을 쫓아 빏아나아갔다.
이곳에 있어서의 모든 것은 이미 석우당이 기선을 제압했으니 그럴 수밖에.
#
"가능한 것은 가능하고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하다니 그건 무슨 뜻인지요?"
"돋는 해를 막을 수 없고 지는 해를 붙잡을 수 없습니다.
나의 할아버지 시대는 여기서 서울을 가는 데 말을 타도 삼사 일은 걸렸지만 우리 시대는 헬리콥터로 한 시간에 갈 수 있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계성과 가능성의 양면적 존재일 뿐입니다."
"인간의 한계성과 가능성이란 무엇인지요?"
"지허당, 포식은 육체를 죽이고 다사多思는 정신을 죽이게 됩니다.
오늘은 그만합시다.
밤이 깊었습니다.
나는 나의 시간에 충실해야겠습니다.
적어도 이 토굴에서 살고 있는 한 말입니다."
"석우당, 간단히 운자만 띄워 주시지요.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지허당, 삼 년 전 반룡사盤龍寺에서 생활할 때 영원에 도전하여 안주하겠다면서 분망한 시간을 보내더니 지금도 여전하군요.
무한량한 게 시간이고 시종과 본말이 없는 게 시간입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들은 나의 것이 아니지요.
나의 생명은 순간을 보장받지 못한 채 찰나에 서 있을 뿐입니다."
"지허당, 나는 도화道畵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는 것을 기억하오.
대지大知는 한한閑閑이요 소지小知는 간간間間이라고."
"그러니까 지금 나의 소지小知를 대지大知로 끌어올려 주시길 바랍니다."
"대지는 음音은 물론이려니와 묵默까지도 초월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지와 소지의 차이는 천양지차天壤之差입니까, 순치지차脣齒之差입니까?"
나의 물음에 석우당은 입을 다물었다.
계속해서 꿀밤 까는 일손을 놀리고 있을 뿐이었다.
#
건반 위에 손을 올리면서 눈을 감은 석우당은 거침없이 ’은파’를 쳐 내려갔다.
솜씨가 놀라웠다.
그는 이미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나는 걸상에 앉아 석우당이 눈을 감고 피아노를 치면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가늠해 보았다.
저 곡에 맺힌 애절한 사연이라도 있어 내심으로 울면서 추억을 더듬고 있을까?
아니면 백구가 선회旋回하는 호심湖心에?
아니면, 해정海情에 잠겼을까?
그도 아니면, 지난날 피아노 콩쿠르에 출전하기 위해 레슨 받던 때의 정열을 매만지고 있을까?"
’은파’가 끝나자 베토벤의 ’열정’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이것저것을 다 잊어버린 채 눈을 감고 감상삼매에 들어갔다.
나로서는 테크닉을 왈가왈부할 수도 없었고, 리듬과 하모니와 멜로디의 삼위일체가 주는 앙상블도 뉘앙스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때 크래식에 매혹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저 즐겁게 귀를 기울였을 뿐이었다.
’열정’이 끝나자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콘체르트 넘버 원’의 장엄한 서부序部가 울려 퍼졌다.
나는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고 제스츄어는 불안하기만 했다.
끝내 1악장을 넘기지 못하고 건반을 ’쾅!’하고 누르고 난 후 일어섰다.
"지허당, 한 곡 치시지요?"
"글쎄요, 손가락이 굳어서 되려는지요."
나는 소녀가 펼쳐놓은 악보에 맞춰 키를 눌렀다.
’즉흥환상곡’의 묘미는 빠른 템포에 있는데 도저히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런대로 마지막 음을 누르고 난 후 돌아보니 석우당은 창가에 서서 팔장을 끼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
"지허당, 고행은 자기 학대가 아니라 자기 위주가 아닐까요?
다시 말하면 양생이 바로 고행이 아닐까요?"
"석우당, 무서운 양도론법兩刀論法이군요.
마치 문턱을 사이에 두고서 두 발을 벌려 딛고, ’입入이냐, 출出이냐?’를 묻는 것과 같군요."
"지허당, 논리적인 시是와 비非를 떠나 현실적인 시비를 가려보자는 거요."
"표준의 상대성 때문인가요?"
"아니오, 언어의 한계성 때문이오."
"석우당, 그럼 질문에 대한 내 답변을 드리지요.
고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학대임에 틀림없습니다.
자기 학대는 자기 훼손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노자도 언급했지요.
爲道者는 日損이니 損之又損之하여 以至於無爲也라’라고.
손損에 손이 거듭하여 마침내 손할 일이 없을 때, 비로소 득도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 아니겠어요, 자기 위주면 벌써 타인은 안목 밖이 아니겠어요?"
"지허당, 타인을 무시한 자기 위주야말로 진실한 고행이 아닐까요?"
"석우당, 개연적 판단을 떠나 단도직입적으로 결론하시지요.
개연설은 회색적인데 회색적인 것은 언제나 기회와 위선을 노릴 뿐이니까요."
#
"석우당, 인간의 한계성은 무엇인가요?"
"지허당, 사과를 어떻게 정의할까요?
홍紅, 청靑, 황黃의 색소 차이로?
양樣의 대소 차이로?
중량의 경중 차이로?
양良 감甘 산酸의 미각 차이로?
사과의 피와 골수가 주는 감도 차이로?
하나의 물체를 정의내리는 데는 이처럼 많은 각도에서 시찰되고 실험되어 비로소 개념들이 주어집니다.
이 여러 개념 중에는 피상적인 것과 중추적인 것이 있습니다.
사과를 정의함에 있어서 중추적인 것은 예문한 것들 중 전자들이 아니라 후자입니다.
사과의 껍질과 살과 씨알을 모조리 씹어 먹어본 다음에야 비로소 사과의 진성과 진미를 알 수 있습니다.
사과의 껍질만 먹은 사람과 살만 먹은 사람과 씨알만 먹은 사람, 이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정의를 사과에 던집니다.
빙산의 일각을 보는 겪이어서 이들은 서로 시비를 가립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이 있어서 사과를 껍질부터 알맹이까지 모두 먹고 나서 세 사람에게 사과의 정의를 알립니다.
그러면 전자의 세 사람은 시비를 멈추고 합세하여 후자를 공격하다가 끝내는 후자를 미치광이로 치부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합리주의의 노예가 된 현대인의 적나라한 실상입니다.
지허당, 이해가 되시는지 나의 이 우언迂言이."
"글쎄요, 본本과 말末의 문제인데...."
"지허당, 어둠이 제자리를 지키는군요.
인간의 한계성과 가능성은 다음 시간으로 넘깁시다.
우리는 저 어둠처럼 제자리에 충실해야만 하겠지요."
지허스님의 토굴일기 <사벽四壁의 대화>
(2011-10-2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