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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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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하ㄱ~ㅎ
  신념과 철학
 
박영하ㄱ~ㅎ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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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관리란 육체적 관리만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당한 운동과 정신적인 스트레스 해결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매주 산을 오른다. 등산을 통해 지난 한주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고 다음 한 주를 위해 산의 정기를 받아온다. 그리고 한가지 더, 회사를 나서면 회사 일을 잊고 무위도식(?)한다. 철저한 공사구별이 나의 건강유지비결이다.
 
건강을 다지고 피로를 푸는데도 목적이 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아내와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고 내리면서 자식들 이야기, 친구 친척들 이야기, 옛날옛적 이야기... 시시콜콜한 신변잡기같은 이야기를 하고 또 한다. 등산은 내게 아내와 서로 이해하고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을 제공한다. 궂이 이야기를 않더라도 나는 아내가 옆에 있기만해도 마음이 편안해 진다.

 
1992.12.25~28  지리산 종주 (3박4일 눈비를 맞으며 겨울산행)
 
1995.10.04   Aiguille Du Midi(3842m)
                      Telecom `95 Geneve 출장(10/2 ~ 8)

2000.8.23
  백두산 <서파~북파> 종주

2002.3.29   Mt. Kinabalu (보르네오섬 북단/동남아 최고봉/4101m) 등정




2003.10.10   설악산 공룡능선(소공원 매표소 05시 출발-비선대-양폭-희운각- 공룡능선-마등령-비선대-소공원 19시 도착/장장 14시간 산행)

2003.10.21  중국 黃山(1860 m) 등정
                    (with Johnson Control People) 

2007.09.14~15 중국 黃山 등정(A-One클럽)  

2009.04.20~30 네팔 히말라야Annapurna Base Camp  (4130m)Trekking 

2010.09.27~10.02 중국 운남성 여강  호도협    종주 Trekking +  옥룡설산 등정>

         
아내는 나를 '잠꾸러기'라고 놀리곤 한다. 9시 뉴스를 보고 곧장 잠들어서 6시 이후에야 일어난다. 잠잘 것 다 자고, TV볼 것 다보고 어떻게 사장노릇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바로 '항상 메모하는 습관'이다. 늘 몸에 메모장을 지니고 다닌다. 등산가방에도 메모장이 있고, 잠을 청할 때도 머리맡엔 메모장이 놓여 있다. 자주 잊어버리는 내 부족한 메모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늘 내가 해야 할 일, 고민해야 될 것들,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적어두고 Review한다.
 
人材가 회사의 장래를 보장한다는 신념과 철학을 가지고 있다. 개개인의 특성을 잘 파악하여 조직과 개인이 함께 발전하는 방향으로 지도, 육성함으로써 전 조직원의 성과를 극대화 하도록 한 다. 능력있는 사람에게는 책임과 권한을 위양하여 자율적으로 일하게 하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직속상사 중심의 중점관리를 통해 서 장기적 관점에서 육성토록 한다. 이러한 나의 신념과 철학이 평가를 받았음인지 한국인재개발대상 최고경영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1997. 11. 04).
 
1992년 북한 정무원 부총리 김달현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내가 주재임원으로 있던 LG전선 구미공장을 방문키로 되어 서울에서 구자경 회장님과 LG그룹 사장단 몇분이 내려 오셨다.(1992. 07. 21) 국정원(안기부) 관계자가 안내해 온 김달현 부총리 일행과 비산복지관(LG그룹 구미지역 영빈관)에서 점심을 하는 자리에서 있 었던 일이다. 서로 인사말을 주고 받으며 분위기가 무르익는가 싶었는데 언제부턴가 대화가 뜸해지면서 급기야는 끊어지게 되었다. 김달현 부총리의 얼굴에는 불편한 심기가 역력했다. 순간적으로 찬바람이 감돌고 내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이때 구자경회장님께서 허-허- 하고 웃으시며 "내가 북한이란 말이 입에 익어서 그만-"하시고는 다른 화제로 바꿔 말씀을 이어 가셨다. 회장님께서 말씀 중에 자꾸 '북한' '북한' 하시니까 김달현 부총리가 신경이 날카로워졌던 것이다."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 국"인데 말이다. 그 서먹하고 어려웠던 순간을 회장님께서 사과가 아닌 유머로 멋지게 넘기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가 LG전선 구미공장에 근무할 당시, 공장자동화가 잘된 공장으로 선정되어, 회장/사장단이 시찰을 오게 되었다.(1993. 09. 21) 공장을 책임맡고 있는 사람으로서 대단한 영광이었고 또한 나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공장자동화야 있는데로 보여 드려야지 더 준비할 것도 없고.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내 생각/사상과 우리공장의 文化를 보여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Communication & Consensus"였다. Communication & Consensus! "마음을 열고 대화함으로서, 서로를 이해하고 생각과 입장을 공유· 공감하려고 노력하자!"는 뜻이다. 이러한 나의 뜻을 알아주셨음인지, 구자경회장님께서는 "본관 건물벽에 걸려 있는 Communication & Consensus 라는 간판이 퍽 인상적이다"라고, 칭찬해 주셔서 무척 고무되었던 기억이 난다. Communication & Consensus는, 대화를 통해서 서로 交感하고 생각이나 사상을 共有·共感해 나가자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생각이 다르고 입장이 다른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정신이 바탕에 깔려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 더불어 사는 지혜가 필요하다.
 

내 손으로 직접 쓴 편지라.... 정말 오래 전 얘기다. 그래도 굳이 최근의 편지라고 한다면 작년 큰 아들에게 E-mail을 보냈던 게 기억난다. 사실, 아내가 요즘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 하면서 가족들 모두가 E-mail Address를 가지게 되어 가족끼리 서로 메일을 주고받고 있다.

나의 아내가 결혼한 아들/며느리에게 띄운 메일이다

축복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지금처럼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나 할정도로 엄만 무척     행복 하구나.
    이제 엄마품에서 니색시 품으로 돌아간다니
    섭섭한 마음 왜 없겠냐만
    자연의 순리가 아닌가 싶구나.
    요즘 네얼굴이 활짝 피어있는것 만으로도
    엄만 행복하다.
    부디 아빠처럼 가정에 충실하고 사회에서도 존경받는
    남편이 되길바랄뿐이다.
    결혼은 한가정을 이루는 첫출발이다.
    열심이 살아야한다.
    하고싶은말 끝도없다만 자네가 잘하리라 믿네.
    결혼 진심으로 축하하오.

                               2000년3월18일.널 사랑하는엄마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아들아!
    너는 어디에서 이렇게도 아름답고 향기 그윽한 꽃을
    우리 뜰에 심어 놓았니?
    철없던 아들이 이제서야 대견스럽게 보이는구나.

    그래 아들아!
    이제부터 우리 모두 이 꽃나무에 물도 주고
    햇빛도 쬐이고 바람 잘 드는곳에 두어 정성을 다하자.
     그리하여 뿌리가 잘 내려 튼튼해지면
    지금보다 더 싱싱하고 향기 그윽한 아름다운 자태로
    우리집을 감싸돌게 말이다.

                                                         2000년09월06일

나의 사랑스런 며늘아기 혜연에게

    먼저 너의 생일을 축하한다.
    내일 아침 너의 생일상도 차려주지 못하고
    멋진 생일선물도 준비못하고,
    생각하다, 내 마음의 선물이라도 전하고 싶어
    이 글을 쓴다.
    새애기가 우리집에 시집 온지도 엊그제 같은데
    벌써 수개월이 지났구나.
    아들만있어 적적하고 무기력했던 우리가정에
    웃음과 활력소를 불어 넣은 것이 바로 너란다.

    애기야!
    너가 우리집에 들어온 후 우리부부는
    늘 즐겁고 행복하단다.
    항상 상냥하고 착하고....
    못난 이 어미말도 잘 듣는 너가 너무 고맙고 이쁘다.
    그래서인지 난 늘 너가 보고 싶단다.
    너희 둘 내외 지금처럼 사랑하면서 서로 칭찬해 주고
    존경하면서 살아가길 바란다.

    그래 애기야!
    앞으로도 우리 서로 그리워하며 보고싶어하며
    기쁨을 줄 수있는 그런 고부간이 되자꾸나.
    그것이 곧 사랑이 아닐까 생각한다.
    
    끝으로 너의 생일을 다시 한번 축하하며
    두서없는 글로 대신한다. ...

                   2000년 9월 3일 저녁 너를 사랑하는 엄마가


 
 
특별히 노래를 즐겨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노래 좋아하는 사람들 속에서 어찌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럴때면 나는 어김없이 최무룡의 '외나무다리'를 부르곤 한다.
 
결혼하고 두 달 후 독일정부초청장학생으로 독일로 유학 갔었다. 일년 반이라는 기간동안 독일에서 혼자 자취하며 먹은 것이라 고는 정말 '라면'뿐이었다.
간이 나빠져 입원까지 했지만, 그때의 힘들었지만 소중했던 유학 경험이 지금 나에게 큰 재산이 되지 않았나 싶다.
 
96년 처음 LG기공 사장으로 취임했을 때의 LG기공을 떠올려보면 지금과 사뭇 다르다. 사무환경에서부터 사업분야까지.. 문화 를 비롯해 조직, 인사제도 등 예전과 눈에 띄게 달라진 지금의 LG기공의 모습은 나에게도 큰 자랑이자 보람이다.
 
아버님은 내가 세 살 때 돌아가셨다.
꽃다운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신 어머님의 존함은 이(李)자 을(乙)자 생(生)자 이다. 그 당시 남녀를 불문하고, 한 집안에서 단 한 명이라도 고등학교까지 진학시키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교사양성원을 나와 교사가 된 큰누님을 제외하고 작은 누님과 형님,막내인 나까지 세명이 대학을 졸업했으니, 어머님의 정성과 노력은 짐작이 가고도 남음 이 있을 것이다.
어머님은 거의 말씀이 없으셨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셨다. 그래서인지 조용한 어머님 곁에는 늘 동네 아주머니들이 둘러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곤 해 남들은 그런 우리집을 '여자 경노 당'이라고 부르곤 했다.
더울 땐 그늘이 되어주고, 추울 땐 바람을 막아주던 어머님은 정말 따사로운 고목같은 분이셨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공과대학의 특성상 여학생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던 내게 여대 여학생들과의 야유회는 여학생 들과 교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때 만났던 눈이 호수처럼 푸르고 아름다웠던 여학생이 아마도 내 첫사랑이었던 것 같다.
이제 나이 지긋해진 지금, 한번쯤 보고싶지만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안타깝다. 내 홈페이지를 통해서 그때 그 여학생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정말 기쁠 것 같다.
"얼굴 한번 봅시다. 연락 주십시오!"
 


산업평화의 탑은 매년 근로자의 날에 정부가 수여하는 대통령상으로, 근로자와 경영자의 공동노력으로 노사관계의 안정을 이룩 하여, 산업평화 및 국제경쟁력 향상에 선도적 역할을 하는 기업에 주는 상이다.(97.5.1)
지난 80~90년대 우리나라는 노사분규로 엄청난 홍역을 앓았고 특히 87~89년은 파업이 극심했다. 당시 나는 LG전선 본사에서 영업을 맡고 있다가 88년 6월 안양공장 주재임원으로 명을 받아 내려갔다. 시대상황이 그랬지만 정말 어려운 시기였다. 안양공장에서 3년, 그리고 구미공장에 내려가 2년.
힘들었지만 보람도 있었고 기억에 남는다. 얼마나 정이 들었으면 내가 구미공장을 떠나오면서 나중에 나이들어 은퇴하면 구미에 내려와 살겠다고 했을까. 지금은 안양공장앞 산본에 살고 있다. 노경관계는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는 것이 기본이다.
 
67년 신입사원 시절, 세심동축(細芯同軸)케이블 기술개발을 위해 머리와 눈썹을 빡빡밀고 3개월 동안 공장 밖을 나가지 않았던 일,
68년 방수형 웰만텔 통신 케이블 개발 도중 폭발로 인한 화재가 나, 15m가 넘는 지붕에 올라가 불을 끄려다 추락사할 뻔한 일이 생각난다.
또한 83년 AT&T社와 광섬유 생산을 위한 합작투자 및 기술도입계약을 체결할 때의 일이다. 지금은 故人이 되신 김지주 부사장을 모시고 계약관련협의차 미국 출장을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새벽 6시 40분에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6시 20분에 도착하기로 되어있는 KAL 007이 사고가 났다고 했다. KAL 007은 뉴욕에서 출발했고, 우리는 KAL 015로 LA에서 출발하여, 함께 앵커리지에 기착했다가 20분 간격으로 같은 항로로 김포로 날아왔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시대를 좀 앞질러 갔던 것 같다.
이익을 내야하고 성과/결과를 중요시하는 기업에서는 Timing이 중요한데, 나 는 그런 면에서 회사에게도, 나에게도 부담을 주었다.
78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의 광섬유(Optical Fiber)공동개발연구, 84년 국내 최초 LAN(Local Area Network) 개발 착수, KETRI와 LAN 공동연구 계약 체결, 미국 Sytek社와 Local Net 독점공급 계약 체결, 85년 JAE(일본항공전자공업주식회사)와 정 밀전자 기기용 Connector 기술제휴계약 체결, 88년 서울올림픽 CATV Network 독점공급, 93년 국내최대규모의 미8군 CATV System 수주 등….
내 한평생은 '기술개발'과 '신사업'을 찾는 외길 인생이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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