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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살 되던 해, 그러니까 1945년에 호열자虎列刺라는 전염병이 돌았는데
불행하게도 아버님께서는 그 몹쓸병에 걸려 돌아가셨습니다.
1910년 경술庚戌년생이시니 서른 여섯.
이제 막 부모님께는 효도를, 어린 자식들에게는 아버지 모습을 보여 줄 아까운 나이에 그만 운명을 달리하셨습니다.
그날, 사람들이 울며불며 안방과 부엌을 들락거렸고 나는 싸립문 - 우리는 그것을 ’싸랍’이라고 불렀습니다 - 옆 석류나무 그늘에 앉아 집 안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억이 납니다.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입니다.
아버지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하는데도 그날의 기억은 또렷합니다.
아버지는 울산수리조합蔚山水利組合에 근무하셨다고 합니다.
남기신 사진첩을 보면 대단한 미남이셨고 멋쟁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대부분이 상투를 털거나 까까머리에 바지 적삼을 입던 시절이었는데,
아버지는 기름 바른 머리에 넥타이 매고 양복을 입으셨으니....
어떤 사진을 보면 런닝 팬츠 차림에 상장을 앞에 놓고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는데
아마도 아버지는 육상 선수로도 뛰었는가 봅니다.
또 어떤 사진은 고궁을 배경으로 팔에는 외투를 걸치고 머리에는 중절모를 단정하게 쓰신 멋스런 사진도 있습니다.
아마도 서울 출장을 가셨을 때 찍은 사진인가 봅니다.(그시절에 관광이야 했겠습니까...)
아버지는 외아들로 자라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셨는가 봅니다.
14살 때 4살 연상의 우리 어머님과 결혼을 하셨고 저희 4남매를 낳으셨습니다.
할아버지가 일궈놓은 재산이 있어 대처大處(큰도시)로 나가 공부를 하셨고
그래서 농사꾼이 되지 않고 수리조합에 취직을 하여 서기로 근무를 하셨다고 합니다.
조합장은 일본 사람이었고 조합장 다음이었다고 합니다.
금이야 옥이야 하던 외아들이 전염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자
할아버지께서는 상심하다 못해 1년 후 아들 따라 저 세상으로 가셨습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집안의 두 기둥을 잃은 우리집은 말 그대로 풍비박산이 되었습니다.
많던 논밭이 어디에 있는지, 누가 부치고 있는지는 할머니도 어머니도 모르고 사셨답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는다’고 어머님이 버팀목이 되어주셨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아버지와 같이 전염병에 걸리셨다는데 다행이도 어머님은 이겨내셨다고 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철녀鐵女였습니다.
본래는 그렇지 않으셨을텐데 눈깜짝할 사이에 시아버지와 지아비를 여의고 나서 가정을 책임 지려다 보니 철녀가 되신 것이겠지요.
집근처에 있던 논밭 조금을 가지고 호랭이 시어머님 모시며 어린 네남매를 훌륭하게 키우셨습니다.
그런 어머니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나고 자랐는데도 짠 것, 매운 것을 싫어합니다.
고추장이나 찌게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집사람은 이런 나를 비아냥대서 ’촌놈 꼴갑한다’고 놀립니다.
그런데 저하고 비슷한 면면이 아버지에게도 있었던 것같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손수건을 지니고 다니셨다고 합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더더욱 울산 시골바닥에서.
그런데 아버지는 손수건만은 어머니께 맡기지 않고 당신이 손수 빨았다고 합니다.
애처가라서 그러셨는지?
아니면 깨끗하게 빨지 않아 못미더워 그러셨는지...
얼굴도 기억 나지 않는 아버지.
그래도 우리부자, 부자父子 아니랄까 봐 비슷한 데가 있긴 좀 있습니다.
그래서 예부터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있나 봅니다.
<2011-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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