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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66.   나 어렸을 적 기억과 추억<2011-05-07> | 박영하 | 출처 : - 2019-03-21
첨부파일 : 스캔00036.jpg
 



나는 네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일찍이 너무 일찍이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나는 여자들 속에서 자랐습니다.

할머니 어머니 큰누나 작은누나 형 그리고 나.

모두 여섯 식구였는데 형은 울산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는 부산으로 나갔습니다.

그때가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큰누님도 초등학교 선생이었기에 여기저기로 발령을 받아 객지 생활을 해야했고

작은 누님마저도 울산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는 부산으로 나가서 취직을 했습니다.

그러니 나 어릴 때는 할머니 어머니 나 셋이서 살았습니다.


그때 우리집에는 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짓는 머슴들이 있었습니다.

큰머슴과 새끼머슴이.

여러 사람들이 거쳐갔는데 그중에는 지금도 웃음이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춘자 아버지>라고.

어머니쪽 먼 친척이었는가 본데 약간은 모자라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뭘 잘못해서 어머니가 야단이라도 치면 ’자가 와 이라노?(저사람이 왜 이러나?)’하면서 얼굴을 붉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머니 보다 나이가 많았던가 봅니다.

이 양반이 어느 여름날, 논일을 하러 들판으로 나가는데 동천 - 우리는 <냉그랑>이라고 불렀습니다 - 이라는 개울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내린 비로 개울물이 평소보다 불어있었습니다.

바지가랭이를 바짝 걷어올려 붙이고 건너려는데 마침 냇가에서 빨래를 하던 아낙네들이 ’춘자아버지’를 알아 보고는


"춘자아버지, 물이 불어 깊습니다.

허릿춤까지 찹니다."


그랬겠다.

그말을 곧이곧데로 들은 춘자아버지는 저쪽으로 가드니만 바지를 홀라당 벗어 허리춤에 끼고는 개울을 건넷답니다.

그런데 아뿔싸, 물은 무릎을 약간 넘는 정도 였다나요?

빨래터에 앉아있던 아낙네들은 배꼽을 잡는다고 웃어댔고.

소문은 입을 타고 온 동네에 퍼졌습니다.


춘자아버지는 참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추운 겨울이 되면 코에서 흘러내리는 콧물을 주체 못해 콧물이 입으로 흘러들기가 일쑤였습니다.

굵은 무명베 바지 저고리를 두 겹을 껴입었어도 허리를 구부리면 맨 살이 나와 추위에 떨기가 일쑤였습니다.

그 시절에는 내의內衣같은 것은 부자들이나 입는 사치품이었습니다.

농사철이 아닌 겨울이 되면 소를 몰고 먼산으로 땔감나무를 하러갔습니다.

삼사십리길이었으니 아침을 먹고 나가면 저녁 무렵에야 돌아왔습니다.

나무를 잔뜩해서 소등에 싣고는 나뭇짐 사이에 참꽃(진달래과)을 여기저기 꽂아왔습니다.

보기에도 멋 있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내가 그 참꽃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춘자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나뭇짐에 꽂아오는 참꽃을 따먹곤했습니다.

맛이 있어 그랬는지, 별로 먹을 것이 없던 시절이라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또 겨울이면 저녁마다 동네 머슴들이 볏집을 한아름씩 가지고 춘자아버지방으로 몰려들었습니다.

한 방 가득 둘러앉아 물을 추긴 볏집으로 새끼를 꼬면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던 모습들이 눈에 선합니다.


또 이런 머슴도 있었습니다.

<이석사>라는 분이었습니다.

이름이 석사였는지, 아니면 박식하다고 붙여준 별명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석사는 할아버지가 계실 때 우리집일을 했었나 봅니다.

할머니의 먼 친척이라고 들었습니다.

이 양반은 할아버지 제삿날이면 반드시 우리집엘 왔습니다.

제사를 지내고 음복을 하고는 마당에 놓여있던 평상으로 내려갑니다.

그때부터 새벽까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습니다.

여름철이라 사람들은 더러는 마루에서, 더러는 평상에서, 더러는 멍석을 깔고 앉아

이석사가 구성지게 읊어대는 <유충열전>을 밤 늦게까지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마치 무성영화시대의 변사와 같았습니다.

이석사의 입담은 <유충열전>말고도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이름이 생각이 나지않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청원재판소에서 편지가 한 통 날라왔습니다.

’출두하라’고.

그때나 지금이나 ’재판소’로 오라니....

시골 아낙인 우리어머니, 얼마나 놀랬고 걱정스러웠을지는 불문가지입니다.

그때가 1950년대 중반이었으니 울산에서 청원까지는 까마득히 먼 곳이었습니다.

옛날에 할아버지 계실 때 거기에 논밭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넓은 들판이었다니 수 천 평은 되었겠지요.

오랫동안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니(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경작을 하던 사람들이 (부재지주로)소유권 이전 신청을 했었나 봅니다.

어머니는 지금 짓고 있는 농사일도 힘 겨운 판에 멀리 떨어져 있는 논밭에는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더더욱 그때는 <땅값....> 같은 것은 이야기도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출두하지 않았습니다.

얼마전 혹시나 싶어 찾아봤는데 찾지를 못했습니다.

수안보 근처라고 들었는데....


우리집은 언제나 여자들로 붐볐습니다.

할머니 어머니에, 막내고모가 딸을 대리고 우리집에 와서 더부살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부엌심부름을 하던 여자애도 있었습니다.

우리집은 언제나 동네 어머니들로 북적였습니다.

제사가 있거나 잔치가 있으면 우리집은 일가친척들의 놀이터였습니다.

아마도 남자가 없는 집이라  편해서 그랬나 봅니다.

무엇보다 성호댁이 모두를 편하게 해 줘서 그랬었겠지요.

사람들은 우리 어머님을 <성호댁>이라 불렀습니다.

어렸을 적 언젠가 내가 아파서 할머니가 나를 한약방에 데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약방 노인이 코흘리게인 나를 진맥하고는 할머니에게 ’이 아이, 하초가 약합니다’고 하던 말이 지금도 마음에 걸립니다.

지금도 나는 ’하초’가 무슨 말인지 잘 모릅니다.

짐작만 할뿐.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초’가 약하다는 나는, 젊었을 때 씨를 뿌리기만 하면 싻이 터곤 해서 애를 먹곤했습니다.

밭이 좋아서 그랬는지?


                                                         <2011-05-07>


               찔레꽃


                               노래 : 이연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밤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하얀 발목 바쁘게 내게 오시네

밤마다 보는 꿈은 하얀 엄마꿈

산등성이 너머로 흔들리는 꿈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개나리`와 `진달래`의 어원


`개나리`와 `진달래`의 `개-`와 `진-`이 접두사임을 아시는 분은 그리 많지 않으실 것입니다.

`개나리`는 `나리`에 접두사 `개-`가 붙은 것이고

`진달래`는 `달래`에 접두사 `진-`이 붙은 것입니다.


나리꽃은 나리꽃인데, 그보다도 작고 좋지 않은 꽃이라고 해서 `나리`에 `개-`를 붙인 것이고,

달래꽃은 달래꽃인데 그보다는 더 좋은 꽃이라고 해서 `진-`을 붙인 것입니다.


원래 `나리`꽃은 `백합`꽃을 일컫던 단어였습니다.

`백합`꽃과 `개나리`꽃을 비교해 보세요.


`나리`꽃과 `달래`꽃을 아시는 분은 아마도 고개를 끄덕이실 것입니다.

이처럼 좋은 것에는 접두사 `진-`을, 좋지 않은 것에는 접두사 `개-`를 붙인 단어가 우리 국어에는 무척 많지요.

이러한 것의 전형적인 것을 들어 보일까요?

`개꽃`과 `참꽃`을 아시는 분이 계신가요?

그렇다면, 그분은 아마도 대전과 군산을 잇는 경계선 아래에 고향을 두신 분입니다.

즉 이 단어는 영남과 호남의 일부지방에서만 사용되는 방언입니다.

그 북쪽이 고향이신 분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꽃은 `참꽃`이고 먹을 수 없는 꽃은 `개꽃`이지요.


                                                          


 

 

 



<2011-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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