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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 창문에 빗방울이 맺혀있어 비가 오나 하고 내다 봤더니 오는듯 마는듯 했습니다.
접이우산을 주머니에 질러넣고 집을 나섰습니다.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냥 맞으며 걷기로 했습니다.
수리산을 올랐습니다.
산길엔 떨어진 나뭇잎들이 수북수북 쌓여있었습니다.
영하零下의 추위라고 법석을 떨었는데 오늘은 비도 내리고 그렇게 춥진 않았습니다.
간밤에 내린 비로 눈들이 녹아들어 군데군데 흐옇게 쌓여있었는데
정상으로 오르니 온통 눈밭이었고 낙엽 위에 고인 빗물이 살짝 얼고(?) 있었습니다.
산을 오르며 문득 옛생각이 났습니다.
여기 저기 낙엽위에 하얗게 쌓인 눈들을 보면서.....
옛날에 우리집 뒷뜰에 파초芭蕉밭이 있었습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 장독대 옆에.
몇해 걸러 한 번씩, 어른 손가락만한 바나나들이 열렸습니다.
겨울이 오면 윗둥치를 싹둑 잘라내고 덩겨를 켜켜히 쌓고 그 위에 짚을 엮어 덮어줬습니다.
얼지말라고.
봄이 오면 덮었던 짚들과 덩겨를 걷어주고.
여름이 되면 줄기가 다시 솟아나고 바나나 큰잎들이 장관을 이뤘습니다.
파초의 뿌리는 약초였습니다.
지붕을 잇다가 (가을걷이가 끝나면 겨울이 오기전에 추수한 볏짚을 엮어 초가지붕을 새로 갈아 덮는다 )
지붕에서 떨어져 엉덩이나 팔다리를 삐면, 파초뿌리를 찧어바르면 낫는다고 해서,
우리집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낙엽위에 쌓인 눈을 보면서 옛생각을 했다.....????
옛날에 농삿일을 할 때, 밭을 매거나 논 일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을 모아 들 일을 할 때,
점심밥이나 참을 가져가야 하는데 그릇도 부족하거니와 설사 있다해도 무거워 가져가기가 여간 힘 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집에서는 파초잎을 따서 물에 씻어 그것으로 그릇을 대신했습니다.
파초잎 위에 반찬들을 올려놓았습니다.
언젠가 오키나와 갔을 때도, 바나나 트리를 보면서 옛생각이 나서 집사람에게 파초잎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는데 오늘 낙엽 위에 쌓인 눈을 보며 또 그 옛생각이 났습니다.
그 파초밭이 있었던 자리가 지금은 은행지점장실이 되었습니다.
옛집을 농협에 팔았는데 언젠가 고향에 들렀을 때, 옛집이 그리워 가봤더니 농협지점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오지랍 넓은 우리집사람, 지점장을 찾아 ’여기가 우리집이었다’고 했습니다.
지점장실이 장독대 아니면 파초밭자리였습니다.
--------- 원본 메일 ---------
보낸사람: 박영하 <youngha@parkyoungha.com>
받는사람: 조희재 <heyjoe39@hanmail.net>
날짜: 18.11.26 07:40 GMT +0900
제목: 생각 난다 - 파초芭蕉
베란다 창문에 빗방울이 맺혀있어 비가 오나 하고 내다 봤더니 오는듯 마는듯 했습니다.
접이우산을 주머니에 질러넣고 집을 나섰습니다.
RE: 생각 난다 - 파초芭蕉 | 박영하 | 출처 : - 2018-11-26
"芭蕉의 꿈"이란 무슨 노래? 詩句가 생각나고,
또 옛 부산공장 시절 長箭洞 부산대 서북쪽 金星社 私宅 같았던 "峰友里"마을에
집집마다 무성하게 자라던 파초가 선명히 떠오릅니다.
新入하여 몇년씩 전세방으로 전전하다가 그것이 파초의 꿈이었는지,
열몇명이 뜻을 같이 하며 공동주택을 지어서 함께 살며(1집이 100평)
저마다 넓은 정원을 꾸몇는데 공통적으로 파초는 많이 심었지요.
지금 모두는 기억나지 않지만 20년 가까이를 같이 살며
아이들 초등학교 부터 크는 모습들 다 보며 살던분들;
문정환,손기락,안치한,김종길,정순관,이준식,한상술,엄학영, 조희재, 그리고 더 나이드신 작고한 분들 몇명...
그때의 파초의 꿈은 일단 자기집을 갖는것으로 이루었고,
지금도 그자리는 그데로 인데 모두 4~5층 다세대 주택으로 남아 있습니다.
박형의 그때 그 "파초의 꿈"은 아마도 은행지점장이 었을까요?
사모님이 찾으셔서 말을 걸어보셨다는 얘기가 너무 재미있고, 마치 아련한 한점의 수채화를 기억하는듯 합니다.
두분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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