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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5.  노래와 연상聯想 | 박영하 | 출처 : - 2019-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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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이 지나 또 봄은 가고 또 봄은 가고

그 여름날이 가면 더 세월이 간다 세월이 간다

아 그러나 그대는 내 님일세 내 님일세

내 정성을 다하여 늘 고대하노라 늘 고대하노라


노르웨이, 빙하의 항구 베르겐의 스산함을 노래한 <Solveig`s Song> 입니다.

Rocky Van 친구들과, 옛날에, 열흘간, 3000 km를, 버스와 유람선을 타고, 북유럽을 여행하던 기억이 선합니다.

폭포와 피요르드의 나라, 노르웨이.

만년설 玉빛 빙하에서 녹아내리는 폭포, 폭포, 폭포.......

바다도 아닌 것이

江도 아닌 것이

넓기는 호수같고

길이는 200 km도 더 된다는 Fjord가 가는 곳마다 시원했습니다.

쇼프폭포에서는  "빨간 요정"을 만나기도.....

이 노래를 들을 때면 북유럽 여행을 함께 한 김회장이 떠오릅니다.

김회장이 이 노래를 좋아했던 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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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집으로 돌아가리.

봉황산鳳凰山 고개 넘어

끝없는 나그네 길

이제 쉴 곳  찾으리라.

서산西山의 해, 뉘엿뉘엿

갈 길을 재촉하네

저 눈물의 언덕 넘어, 이제 집으로 돌아가리


곽성삼이 부른 <귀향歸鄕>이란 노래입니다.

오래전(10년도 더 지났을 것 같은데....), 후배님이 이 노래를 메일에 담아  보내왔습니다.

’좋다’고,  ’들어보시라’고.

(솔직히) 그 땐, 노래가 좋긴 한데 좀 ’청승맞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잊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구성진 곽성삼의 노래소리가 애잔하게 내게 다가왔고

좋아졌습니다.

요즘은 하루에도 몇번을 듣고 또 듣습니다.

이 노래 들을 때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이 노래를 알고서도 10년 세월을 더 묵히고서야 참맛을  느끼는데

후배님은 어찌 그래 일찍이도 이 노래가 진국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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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 나를 안고 살았나

내가 운명을 안고 살았나

굽이 굽이 살아 온 자욱마다

가시밭길 서러운 내 인생

다시 가라하면 나는 못 가네

마디마디 서러워서 나는 못 가네


류계영이 부른 <인생人生>이란  노래입니다.

옛날을 회상하며 쓴 글 <그립다고 말하기엔....(2010-04-23)>에서 나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어릴 적 시절이 남들보다 어려웠었다고 나는 생각지 않는다.

내 어릴 적에는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끼니를 걱정하다 못해 굶기를 밥 먹듯 했었고

정말 잘 사는 집이라야 걱정 없이 하루 세끼를 먹는 정도였지 않았겠나 싶다.(물론 시골 이야기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굶지는 않았고 더우기 부산으로, 서울로 유학을 다닐 수도 있었는데.....

그런데 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슬프고 서러웠던 기억만 생각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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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줄 모르게 세월이 갔소.

오는 줄 모르게 황혼이 왔소.

동생들위해서 한 평생 바친 이 몸

이대로 속절없이 끝나버려도

한이야 없다지만

가을밤 낙엽소리 야속합니다.


이미자가 부른 <언니>란 노래입니다.

어려웠던 가정 형편을 생각하면 고향 울산의 고등학교로 진학했어야 당연한 일이었는데도

나는 부산으로 유학을 갔었습니다.

내가 원했기도 했었지만 작은 누님이 부산에서 취직을 하고 있기도 했었습니다.

우리는 자취를 했는데 동대신동 구덕수원지앞이었습니다.

내가 다니던 경남고등학교 밑이었고 작은 누님이 근무했던 부산여상도 가까웠습니다.

토요일이면 울산집으로 가서 쌀과 김치를 싸들고 월요일 새벽에 부산으로 오는 생활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부산에 전철이 있을 때였습니다.

구덕운동장 종점에 내려서 한손에 쌀자루, 또 한 손에는 김치단지를 들고 자취방으로 가는데

때마침 학생들이 등교하는 시간이라,  등뒤를 따라오는 부산여고학생들에게 비칠 내 모습에 신경을 쓰던 일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어느집 문간방에 세를 들어 살았는데 화장실은 집안채에 있어 밤에 급한 일이 있을 때는 정말 난감했습니다.

남자인 나는 그래도 적당히 지냈는데 여자인 누님은 어떻게 했을런지 지금 생각해 보면 끔찍합니다.

작은 누님의 뒷받침이 있어 나는 서울로 유학을 올 수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누님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나는 부산으로의 유학도 엄두 조차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작은 누님은 나의 은인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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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진아가 부르는 노래 <사모곡思母曲>을 좋아합니다.

구성지게 너머가는 노래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심금을 울리는 가삿말입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앞산 노을 질 때까지

호미자루 벗을 삼아

화전밭 일구시고 흙에 살던 어머니

땀에 찌든 삼베적삼 기워입고 살으시다

소쩍새 울음따라 하늘 가신 어머니

그 모습 그리워서

이 한 밤을 지샙니다


무명치마 졸라매고

새벽 이슬 맞으시며

한 평생 모진 가난

참아내신 어머니

자나깨나 자식 위해

신령님전 빌고 빌며

학처럼 선녀처럼 살다가신 어머니

이제는 눈물 말고 그 무엇을 받치리까


일찍 아버님을 여의고 홀어머님 슬하에서 막내로 자란 나는 울어머니가 어떻게 사셨는지를 눈으로 보며 자랐습니다.

학교에 내는 월사금은 현금인데 시골에서는 현금을 손에 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어머님은 집앞 채마밭에 있는 채소들을 뽑아 머리에 이고 시골장터로 가서 하루종일 팔았습니다.

어떤 날은 팔리지가 않아 해가 지고 땅거미가 질 때까지 집에 오질 못하고 장터에 앉아있어야 하셨습니다.

그런 날이면 할머니는 대신 저녁밥을 지어실만도 한데 큰길가로 나가셔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우리 며느리 못 봤느냐’고 물어시던 분이셨습니다.

며느리가 늦어서 죄송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면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는

’안 팔리면 그냥 와야지, 왜 이래 늦었느냐?"고 역정을 내셨습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님의 꾸중에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저녁밥을 지어시러 컴컴한 부엌으로 얼른 들어가셨습니다.

정작 어머님 당신께서는 진종일을 굶어 허기가 지고 몹시 지치셨을텐데도....

그때는 어려서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눈물이 납니다.

그러면서 어머님은 딸 아들들을 대학까지 보내셨습니다.

그때는 아버지가 계시고 그런데로 사는 집들도 자식들을 초, 중, 고등학교 보내는 정도였지,

도시로 유학을 보낸다는 것은 쉽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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