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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7.  박영하 Story | 박영하 | 출처 : - 2050-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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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다니던 시절, 매년 새해가 시작되면 사원들과 함께 태백산을  올라,  천재단에서 시산제를 올렸습니다.

회사와 우리 모두의  발전과 안전을 빌었습니다.

옛 자료집을 찾아보니 2001년 2월 10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득히 먼 오래전 이야깁니다.

사원 100 여명과 함께 눈덮힌 태백산에서 시산제를 지내고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당골 석탄박물관쪽으로 내려왔는데 앞서가던 사원 여러명이,

눈 쌓인 내리막 산길에서  자리를 깔고 눈썰매를 타며 내려갔습니다.

해마다 이 길로 하산을 하며 사람들이 비료푸대를 깔고 눈설매를 타는 것을 익히 보아오던 참이라....

나도 슬며시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엔 비교적 덜 가파른 길에서 조심조심 살살 ....

재미가 설설 붙자 간댕이가 붓기 시작....

그러다 아이쿠 !  그냥 막 내리닫는데 멈출 수가 없었고...

내닫는 속도가 워낙 빨라, 속도를 줄이기 위해 옆에 있던 나무를 발로 걷어 찼고,

그 바람에 발목이 뿌러지고 말았습니다.

청량리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서울대학교 병원 야간 응급실로 가서 치료를 받고 깁스를 했습니다.

그러고 한달 동안, 목발을 짚고 쩔뚝거리며 회사를 다녔습니다.

명색이 사장이라는 사람이......


태백산 비탈진 산길에서 눈썰매를 타던 그 무렵, 나는 강원도 인제 내린천 급류에서 래프팅을 하기도 했습니다.

산山은 쉰이 넘어 시작했고 스키는 예순이 가까워 배웠습니다.

수리산 산길에서 스키를 타기도 했었고 태국여행 가서는 하늘을 쳐다보고 누워 코끼리발맛사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일흔이 가까워 헬스클럽엘 나가기 시작했고,

여든을 바라보며 기타를 치기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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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미건조하게 지내기 쉬운 생生의 후반後半, 몰입沒入할 낙樂을 찾아,

2014년 1월 2일부터 통기타 교습을 받았습니다.

한 곳도 아니고 두 곳에서.

그리고 집에서 매일 3 ~ 4시간씩을 연습합니다.


나는 태어나기를 약골로 태어났고 평생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아왔습니다.

그런 내가 2008년 1월 7일부터 헬스클럽엘 나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산을 오르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하체운동을 주로 하였습니다만,

2012년부터는 몸을 만들어 보겠다고 상체훈련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루 2시간씩.


우리 속담에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지요.

내가 그렇습니다.

나는 산이 좋아 산에 미쳐 살고 있지만 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에 산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구미공장장으로 근무하면서 2년간 금오산을 백 번도 더 올랐습니다.

산에 가서 기氣를 받고 오면 일주일을 버텼습니다.

기억에 길이 남을 첫 산행은 <눈 오는 겨울 지리산 종주>입니다.

지리산 종주를 시작한 날이 1992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 저녁이었습니다.

우리부부 중산리에서 저녁을 먹고는 겁도 없이 야간 산행에 들어갔는데 하늘에 총총하던 별들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랬던 날씨가 다음 날부터 산행(3박 4일) 내내 눈비가 내려, 몹시 지친 집사람이 나를 붙들고 울기도 했습니다.

그후로 산맛을 들여 전국의 산들을 누비다가 2000년 8월 23일, 백두산 서파에서 북파까지 새벽 2시부터 15시간을 종주하기도 했습니다.

지리산 겨울 종주와 백두산 종주는 우리부부 잊을 수 없는 추억이고 감격이었습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용기가 생겨, 2002년 3월 29일, 보르네오섬 북단에 있는 Mt. Kinabalu(4,095m)를 올랐습니다.

동남아시아 최고봉입니다.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2시에 3300m에 위치한 산장을 출발하여 정상頂上인 Low’s Peak에 오르니

해는 벌써 뜨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100m, 30분간을 헐떡이며 기어올랐습니다.

내가 늙으막에 등산으로 그나마 주위의 이목을 끈 것은,

만년설이 쌓인 설산雪山 Annapurna Base Camp(4130m) 트레킹입니다.(2009. 04. 20 ~ 30)

높이 올라갔다 싶으면 계곡으로 도로 내려가고 또 오르면 다시 내려가고.

이런 오르내림의 연속으로 우리들은 지칠대로 지쳤습니다만,

이런 경험은 2003년 10월 설악산 공룡능선에서 이미 체험을 했던 터라, 무난히(?) 극복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내친 김에 이듬해 2010년 9월에는 중국 운남성 호도협虎跳峡 을 종주하고

옥룡설산玉龍雪山(5100m)도 등정을 하였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컴퓨터와 씨름하고

오전엔 근육단련 나가고

오후엔 기타를 치고

주말이면 산엘 오르고.........

즐겨서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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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아버님을 여의고 홀어머님 슬하에서 막내로 자란 나는, 울어머니가 어떻게 사셨는지를 눈으로 보며 자랐습니다.

학교에 내는 월사금은 현금인데 시골에서는 현금을 손에 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어머님은 집앞 채마밭에 있는 채소들을 뽑아 머리에 이고 읍내장터로 가서 하루종일 팔았습니다.

어떤 날은 팔리지가 않아 해가 지고 땅거미가 질 때까지 집에 오질 못하고 장터에 앉아있어야 하셨습니다.

그런 날이면 할머니는 대신 저녁밥을 지어실만도 한데 큰길가로 나가셔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우리 며느리 못 봤느냐’고 물어시던 분이셨습니다.

며느리가 늦어서 죄송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면,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는

’안 팔리면 그냥 와야지, 왜 이래 늦었느냐?"고 역정을 내셨습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님의 꾸중에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저녁밥을 지어시러 컴컴한 부엌으로 얼른 들어가셨습니다.

정작 어머님 당신께서는 진종일을 굶어 허기가 지고 몹시 지치셨을텐데도....

그때는 어려서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눈물이 납니다.

그러면서 어머님은 딸 아들들을 대학까지 보내셨습니다.

그때는 아버지가 계시고 그런데로 사는 집들도 자식들을 초, 중, 고등학교 보내는 정도였지,

도시로 유학을 보낸다는 것은 쉽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릴 적 시절이 남들보다 어려웠었다고 나는 생각지 않습니다.

내 어릴 적에는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끼니를 걱정하다 못해 굶기를 밥 먹듯 했었고

정말 잘 사는 집이라야 걱정 없이 하루 세끼를 먹는 정도였지 않았겠나 싶습니다.(물론 시골 이야기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굶지는 않았고 더우기 부산으로, 서울로 유학을 다닐 수도 있었는데.....

그런데 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슬프고 서러웠던 기억만 생각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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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등학교 다닐 때였습니다.

작은 누님과 함께 부산 동대신동 구덕수원지앞 어느집 문간방에 세를 들어 자취를 했습니다.

어느 해 여름, 감기가 들어 며칠 동안 학교를 가지 못하고 꼬박 누워지냈는데 일어나 보니, 깔고 있던 요는 물론 방바닥에까지 곰팡이가 퍼렇게 쓸어 있었습니다.

여름에는 습기 차고 겨울엔 불기火氣 하나 없는 냉골의 작은 문간방에서 우리는 화장실도 못가고 3년을 살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라면 나는 그 기억밖에는 없습니다.


고향이 울산 시골인 우리 형제는 부산에 있는 경남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형님은 나보다 5년 선배이셨습니다.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시고 서울로 진학을 하고 싶어하셨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부산대학교엘 가셨습니다.

친구들은 서울로들 가는데 형님은 못가게되니 학업에 재미를 잃으셨습니다.

형님의 실패를 보셔서 그랬던지 내가 서울대학교에 시험을 보겠다고 했더니 어머님께서는 말리지 않으셨습니다.

나중에 어머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서울대학교가 얼마나 어려운데 지가 붙을 수가 있겠나. 소원이나 들어주자.’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밭을 메고 있는데 지나가던 마을 이장이

"성호댁(어머님 댁호)이요 !

영하가 서울대학에 붙었습디다. 축하합니다"

그말을 들은 어머님은 등록금 걱정이 앞서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무척 기뻤다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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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 1학년 때 핫바지에 고무신을 신고 (명동에서) 가정교사를 했습니다.

사실이지 내가 서울로 올 형편이 못되었는데 친구 어머님께서 서울에 가정교사 자리를 미리 마련해 주셔서 서울로 올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댁 안주인이 내친구 어머님과 경남고녀 동기동창이어서 내가 그집 막내아들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피아노상회는 명동2가 명동공원 바로 앞에 있었고 살림집은 회현동에 있었는데

회현동집에는 애를 가르칠 때만 갔었고 잠은 명동 피아노가게에서 점원들과 한 방에 잤습니다.

달리 내가 공부할 공간이 없었습니다.

핫바지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으니 그들이 보기에 가관이었을 것입니다.

회현동집 식구들과의 인간적인 갈등.

휘황찬란한 명동의 밤거리.

나는 방황을 했고 그럴 때면 길가 좌판에서 파는 개비 담배를 - 피우지도 못하면서 - 사서 물었습니다.

인간적인 갈등과 좌절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반 년 만에 내 발로 그집을 걸어나왔습니다.

갈 데가 없었습니다.

학교앞 잔디밭에서 이틀밤을 떨었습니다.

그때가 늦은 가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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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4월 30일 ROTC 소위로 군복무를 마치고 다음날 5월 1일 한국케이블(금성전선)로 출근을 했습니다.

시험은 금성사로 쳤는데 한국케이블(주)로 발령이 났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공장 준공식(4월 25일)을 거행한 1 주일후였으니,

신생 회사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조금은 있겠다 싶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벌써 기라성같은 경력사원과 선배사원들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어디를 가도 빠지지 않을 특출한 선배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많이 배우며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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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5월 4일, 안양공장 피복선공장에서 폭발사고로 화재가 났었습니다.

미8군에 납품할 방수형 Wellmantel 통신케이블을 개발할 때였습니다.

내가 개발담당자였는데 토요일 저녁이라 작업자들 말고는 사람들이 별로 없을 시각이었습니다.

아스팔트 도포장치에서 갑자기 쾅 ! 하며 아스팔트가 천정으로 치솟았고

떠거운 아스팔트가 묻은 나무천정이 열을 받으면서 불타기 시작했습니다.

까마득히 높은 공장 천정이라 손을 쓸 길이 없었고.

나는 정신 없이 공장 밖으로 뛰어나가 지붕위로 올라갔습니다.

어떻게 올라갔는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올라가긴 했어도 물이 있어야 불을 꺼지.

그때 럭키 하이타이 공장이 금성전선 안양공장 바로 옆 울타리 너머에 있었습니다.

하이타이공장 아가씨들이 불을 끄러 쫓아왔습니다.

길게 일렬로 줄을 서서 물통을 건네주고 건네받고 해서 지붕에 올라가 있던 내게까지 전달이 되어 간신히 불을 껏습니다.

소방차는 불 끈 다음에야 왔었습니다.

지금도 아찔한 것은 지붕에는 채광창이 여기저기 있었는데 불에 녹아 밟으면 푹 빠져 십여미터 아래로 떨어졌을 수도....

다음 달 조회때 포상으로 선풍기를 타서 고향 어머님께 선물을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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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독일로 연수를 떠난 것이 1970년 2월 2일.

부족한 외화外貨를 벌어들이기위해 광부와 간호원들을 독일로 보내던 시절입니다.

말이 광부이지 대학을 나온,  그래서 광산 구경도 못해 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때는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많은 개발도상국가들이 독일의  우수한 기술과 기계를 필요로 했고

독일정부는 자국의 상품과 기술을 팔기위해 개발도상국들에게 원조援助를 하므로서 붙들려고 애를 썼습니다.

나는 그런 독일정부의 CDG( Carl Duisberg Gesellshaft) Program - 각국의 청년들을 독일로 불러 연수를 시켜주고 그들을 통해서 독일을 알리고 친하게 지내자는 취지의 프로그램 - 에 뽑혔습니다.

그때만해도 외국에 나가는 것은 행운이었고 그런 좋은 기회를 내가 잡은 것입니다.


나는 그런 행운을 잡고도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결혼한지 3개월밖에 안된 아내를 두고 떠나게되었으니 말입니다.

그것도 어렵사리 한 결혼이었고 내가 떠나면 아내가 머무를 집도 절도 없는 형편이었으니......

결혼이야기는 너무 길고 복잡하니

To make a long story short !

어쨌던 떠났습니다.


처음으로 타보는 비행기라 무척 긴장했습니다.

동경에서 갈아타고 도중에 서너곳에 기착하면서 꼬박 하루를 날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습니다.

CDG본부가 Saarbruecken이라는 먼 곳에 떨어져 있어 반나절을 또 버스를 타고 가야했습니다.

그래도 젊어서였던지, 긴장해서였던지  별 탈 없이 그럭저럭.....

하긴 ’독일에 잘 도착했노라’고 엽서를 쓰서 우체국 우체통인 줄 알고 넣었는데

그것이  우체국이 아닌 은행의 우편함이어서, 사정을 해서 돌려 받은 해프닝이 있기는 했었지만....


천리타향 머나먼 이국 땅 독일이었음에도 이틀만에 그곳 병원에 근무하는 한국간호원들을 만날 수 있었고

간호원들을 통해서 다음날 한국에서 온 유도사범도 만났습니다.

우리는 저녁이면 만나서 맥주를 마셨고 멀리 집을 떠나온 외로움을 서로 털고 달랬습니다.


Saarbruecken의 CDG본부에서는 한달동안 기숙하며 어학교육을 받았습니다.

한달후 Dinslaken이라는 광산촌으로 옮겼습니다.

역시 어학훈련과정이었는데 일반 가정집에서 하숙을 했습니다.

말이 광산촌이지 산은 없었고 그냥 들판과 구릉지뿐이었습니다.

여기서도 이튼날인가 시내에 나갔다가 한국에서 온 광부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으니

그때의 독일은  한국이나 진배 없었습니다(?).

Dinslaken에서 3개월을 살고 Hannover로 갔습니다.

4개월간의 어학 훈련이 모두 끝나고 본격적인 연수에 들어간 것입니다.

Hannover에는 우리회사와 관련이 있던 Kabelmetal社의 Hackethal공장이 있어 그리로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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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안양공장에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 여름, 어머님을 모시고 동해안으로 피서여행을 떠났습니다.

양평 어딘가에서 였습니다.

2차선으로 가는데 갑자기 1차선으로 가던 화물트렄이 우회전을 하면서 내 차를 덮쳤습니다.

큰 화물트렄이 PONY를 덮쳤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죽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른 쪽에 주유소가 있었고 화물트렄 운전사는 주유소를 발견하고는 지나치지 않을려고

갑자기 핸들을 꺾으면서 내 차를 덮친 것입니다.

다행히 두 차는 급정거를 하였고 가까스로 내 차는 운전석 옆문이 찌거러지면서 내려 앉는 정도에서 멈춰섰습니다.

경찰서에 가서 조서를 받고 어쩌고 하다보니 오후가 늦었습니다.

거기서 속초 명성콘도를 갈려면 한계령도 넘어야 하는데 어두워 질 것이 틀림 없고.

더욱이 비도 부슬부슬 내리고.

자동차 문짝을 고치다 보면 밤이 늦을 것 같아, 끈으로 붙들어 매고서는 왼쪽 손으로 문짝을 잡고 길을 재촉해서 떠났습니다.

한계령을 넘을 무렵에는 와이퍼가 작동되지 않아 조수석에 앉은 집사람이 창문을 내려 손으로 와이퍼를 작동시켰으니...

나는 운전하기 바빠 아무 생각이 없었으나 뒷자리에 타신 어머님, 두 아들 그리고 집사람은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

비 오는 캄캄한 밤에, 설악산 한계령 고개를, 고장 난 와이퍼를 손으로 돌리면서 넘어간다....

상상을 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찍 한지.


그때만 해도 자가용 타고 온 식구가 휴가를 간다는 것,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그때 나는 속초에 명성콘도(한화콘도)도 갖고 있었습니다.

내가 자동차를 샀다, 콘도를 샀다 하니까 부잣집 막내아들 쯤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고백 컨데 나는 친구 엄마가 서울에 가정교사 자리를 미리 마련해 줘서, 간신히 서울로 유학 올 수 있었던 가난한 촌놈입니다.

그런 촌놈이 자동차를 산 것도, 콘도를 산 것도, 돈을 몰라서, 돈 쓰는 법을 몰라서 그랬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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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방의동 올림픽선수촌아파트에 살 때, 어머님 여든 여섯번째 생신을 맞았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어머님께서는 건강하셨습니다.

평생을 낮잠을 주무시든가, 낮에 바닥에 눕지를 않으셨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그해 어머님 생신에, 울산에 사시는 일가친척들을 버스를 전세 내어 모셔올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어머님께서 보고 싶어 하셨을 것 같습니다)

울산 부산에서 약 30 명이 오셨고 서울에서 10여 명이 오셨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모두에게 만원짜리 한 장씩을 쥐어주셨습니다.

평생을 돈에 쪼들려 어렵게 어렵게 살아오신 어머님께서 아이 어른, 잘 살고 못 살고 간에 만원씩을 주셨습니다.

더러는 받지 않을려고도 했지만 어머님은 기어히 손에 꼬옥 쥐어주시고야  말았습니다.


친척들을 보내고 어머님은 참 행복해 하셨던 것같습니다.

평생을 신세만 졌던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정을 베풀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고 서너 달이 지났습니다.

나중에야 느낀 일이지만 어머님께서는 거실 소파에 가끔 누워 낮잠을 주무셨습니다.

우리는 게의치 않았습니다.

노인이 눕는다는 것, 극히 정상적인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어머님 당신의 온몸에서 기氣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이었는데도 우리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까, 잠자고 있는 새벽에 아랫층 어머님방에서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습니다.

우리는 이층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내려가 보니 어머님께서 피를 토하고 계셨습니다.

불야불야 어머님을 모시고 현대아산병원으로 모시고 갔으나 이미 어머님께서는 운명을 하신 후였습니다.

어머님을 모시고 우리는 집으로 왔습니다.

차마 병원에서 어머님을 떠나 보낼 수는 없겠기에.


지금도 ’우리 어머님 정말 대단하시다’는 생각을 합니다.

’자신의 삶이 끝나간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고향 친척들을 한 두사람도 아니고 수십명을 불러올렸을까.’

평생을 돈에 쪼달렸던 어른께서 적은 돈이었지만 어른 아이 모두에게 주고 싶어 주고 싶어 손목을 꼬옥잡고.

한 평생을 밭에서 논에서, 힘 든 일, 궂은 일 가리지 않으시고 살으셨는데도,

아프다는 말 한 마디 않으시고 그냥 쉬시는 듯, 잠자는 듯 하시며 가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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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미국 AT&T社와 광섬유 생산을 위한 합작투자 및 기술도입계약을 추진할 때의 일입니다.

김부사장을 모시고 계약관련 협의차 미국 출장을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Atlanta에서 협의를 마치고 귀국하기 위해 L.A.로 왔습니다.

L.A. 에 사시는 법대 동기 몇몇 분들이 저녁을 사셨습니다.

김부사장은 술을 엄청 좋아하셨는데 그당시는 의사의 권고가 있어 금주중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사장께서는 자기에게 오는 술은 내가 대신 마신다고 말씀하셨고

명을 받아(?) 그친구들의 술잔을 내가 모두 받아 마셨고.

혼미한 가운데 비행기를 탔고, 비행기는 Alaska에 중간급유차 기착을 했고.

내렸다가 타라고 해서 비행기에서 내렸고, 비행기에 타라는 방송을 하기에 탈려고 갔더니

입구에 서서 티켓 체크를 하고 있던 스튜어디스와 남자승무원들이 ’다음 비행기’라고 하던 기억이 있고.

새벽 6시 40분에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6시 20분에 도착하기로 되어있던 KAL 007이 사고가 났다고 했습니다.

KAL 007은 뉴욕에서 출발했고, 우리는 KAL 015로 L.A.에서 출발하여,

함께 앵커리지에 기착했다가 20분 간격으로 같은 항로로 김포로 날아왔습니다.

 (한밤중에,  Alaska공항에, 같은 시간대에, 서울로 오는 KAL 비행기  2대가 함께 있을 줄이야.....)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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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L.A. Olympic이 열렸을 때입니다.

당시 사장께서 대한카누협회 회장이기도 하셔서 L.A.올림픽을 참관하러 미국으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나도 따라나섰습니다.

출장목적이 당당하고 거창했습니다.

88 서울Olympic을 준비하기위해서였습니다

AT&T社가 84년 L.A.Olympic 통신지원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견학 조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현지에 가서보니 대규모의 AT&T 통신지원단이 공원을 빌려 캠프를 치고 숙식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협조를 얻어 Olympic 통신지원시설을 견학했습니다.

먼 길을, 그것도 L.A. Olympic엘 갔는데 정작 올림픽 경기는 한 번 구경했던가, 그것도 잠간이었고

나머지 시간들은 스탠드밑 통신시설들을 둘러보며 사흘인가를 보냈습니다.

어쨌던 그 덕분이었는지, 88서울올림픽 CATV시스템을 수주했습니다.

수주경쟁도 치열했고 파급효과도 엄청났습니다.

단일 Project 수주로서 1200만불은 당시로서는 큰 규모였습니다.

그러나 회사는 놀라지도 않았고 평가를 제대로 해주지도 않았습니다.

체신부, 한국전력 같은 관납, 큰 수주에 익숙한 회사여서 별로 놀라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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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들 하시는지요?

1987년에 시작된 노사분규는 요원의 불길처럼 온 나라에 번져,

1989년에는 수 많은 공장들의 문을 노동조합이 닫아 걸고 온 나라를 멈추게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까마득한 옛날 이야깁니다.

부품사업부장을 맡아 본사에 근무하고 있던 내게, 1988년 8월, 안양공장장 발령을 내렸습니다.

노조 본부가 안양공장에 있었습니다.

당시 금성전선 노조위원장이 간단치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갑작스레 발령을 낸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신입사원시절부터 안양공장에서 잔 뼈가 굵었으니 잘 해 낼 수 있을거라 생각들 했겠지요.

그랬는데 89년 2월부터 두달 넘게 공장이 폐쇄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先조업 호소(1989-04-08)>      

(이 연설은 안양지역 예비군 교육장에서 한 것입니다.

금성전선 예비군만 교육 받은 것이 아니고, 다른 회사의 예비군들도,지역예비군들도 함께 교육받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노동조합이 공장을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에,공장에 들어 가지 못하고, 안양시내에 임시사무실을 마련하여 근무하고 있을 때라, 사원들을 만나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예비군 당국에서,이런 사정을 양해하여, 정신훈화 시간을 할애해 줬습니다.

제가 처음 한 대중연설이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

시간은, 흐르는 물과 같이 빨리 지나감을 실감케 합니다.

파업이 시작될 때는, 두툼한 겨울 옷을 입고 눈 덮인 산을 바라보았는데,

50여 일이 지나고 보니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샛노란 개나리, 울긋불긋한 진달래꽃들이

상당한 시간의 흐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언제 풀릴지 모르는 장기파업이라는 긴 터널 속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회사와 조합은 파업을 풀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 해결의 실마리는 좀처럼 보이지 않고

어두컴컴한 골짜기에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오랫동안 여러분을 보지 못하다가, 이곳에 와서 여러분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니,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섭섭하고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식사나 제대로 하는지…

여러분 가정에 주름살이 얼마나 지고 있을지…

이번 파업의 자초지종은 제쳐두고라도, 안양공장을 책임지고 있는 저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常務인 제가, 무얼 하나 제시하거나 해결할 수 있을까? 말로만 하려고 온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하실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현재로서는 비록 어떤 보따리를 여러분에게 풀어놓지 못할지라도,

공장의 최고책임자로서, 여러분의 좋은 충언은 달게 받아들일 것이며,

여러분의 마음과 입장을 이해하는 저의 마음을 여러분들에게 전달하고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모든 일들이 흐르는 물과 같이 순리대로 풀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때로는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우리가 살아 가면서 느끼고 경험하는 교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번 파업도 그런 것 같습니다.

어느 쪽의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과연 노사쌍방이 진행해 온 방법이나 시기의 선택이 적절했는지는 다같이 반성해 봐야 할 것입니다.


다 같은 얼음덩어리를 깨더라도 망치로 내려치는 것보다, 바늘로 쉽고 빠르게 깰 수 있는 방법도 있습니다.

 

                                                                ---   이하 생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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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2월 19일,   LG그룹 경영이념선포 3주년 기념식에서 <인간존중의 경영> 부문 수상을 하였습니다.

구미공장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회장님 모시고 식사를 함께 하는 영광을 우리부부가 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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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9월, LG그룹 공장들 중에서 자동화가 잘 된 현장을 둘러보는 시찰이 있었는데

내가 맡아 있던 구미공장이 공장자동화 우수 공장으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구자경회장님, 허준구회장님, 히로시게廣重회장 그리고 회장 / 사장단 15명, 그룹사 임원 24명의 대규모 시찰단이 우리 공장을 방문했습니다.

공장을 책임 맡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대단한 영광이었고, 나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공장자동화야 있는 데로 보여 드려야지 더 준비할 것도 없었고.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내 생각 / 사상과 우리공장의 文化를 보여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Communication & Consensus"였습니다.


Communication & Consensus !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함으로서, 서로를 이해하고 생각과 입장을 공유 · 공감하려고 노력하자 !"는 뜻입니다.

이러한 나의 뜻을 알아주셨음인지, 구자경회장님께서 "본관 건물벽에 걸려 있는 Communication & Consensus 가 퍽 인상적이다"라고 칭찬을 해 주셔서 무척 고무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Communication & Consensus는 대화를 통해서 서로 交感하고, 생각이나 사상을 共有 · 共感해 나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생각이 다르고 입장이 다른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정신이 바탕에 깔려있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 더불어 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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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5월 1일  근로자의 날을 맞아 정부가 수여하는 산업 평화의 탑 금탑을 수상하였습니다.

산업 평화의 탑은,  매년 산업발전과 노사화합에 지대한 공헌을 한 기업들을 정부가 심사하여 수여하는 상으로,

우리회사(LG기공)가 금탑을 수상함으로서 남다른 노경관계를 대외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다음 날 청와대 초청을 받아 대통령과 오찬을 함께 하였습니다.


다음해(1998. 12. 18),  아프리카  Tanzania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내가 다니던 회사가 탄자니아에서 수년간 통신공사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대통령 두분을 모시고 청와대에서 만찬을 함께 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고생하는 사원들을 격려한답시고 나는 Tanzania 를 여러번 다녀왔습니다.

그때 탄자니아 주재 한국대사가 마침 대학교 동기 - 그는 법대, 나는 공대 - 여서,

내가 출장을 가면 변대사부부가, 나와 우리사원들을 대사관저로 초청해 가든파티를 열어주기도 했습니다.

내가  탄자니아를 갈 때, 더위를 무척 걱정했습니다만(방문 시기가 1월과 7월 등이었던 것 같은데)

막상 가서 보니 생각보다 그렇게 덥지를 않았습니다.

뙤약볕이 내려 쬐는데도 나무 그늘밑으로 들어서면 시원한 그런 날씨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공사현장은 서늘한 나무 그늘밑이 아니었고 뙤약볕이 내려쬐는 더웁고 열악한 현장이었습니다.

그 먼 아프리카땅 탄자니아를 찾아 간 이유도, 그런 열악한 현장에서 고생하는 사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음같아서는 Mt. Kilimanjaro 도 올라가 보고 싶었고,

Serengeti National Park로 가서  Safari 도 해 보고 싶었지만,

뙤약볕 아래에서 고생하는 사원들을 내 두 눈으로 보고서는......

’키리만자로?’

’사파리?’

염치 없어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다음 번에, 다음 번에 하다가 끝내 사파리도 가보지 못하고, 킬리만자로도 올라보지 못하고 공사는 끝나고 말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무척이나 아쉽습니다.

사파리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킬리만자로는 한번 올랐어야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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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아름클럽 친구 부부들과 함께 태국 치앙마이 여행을 가서 아주 귀한 경험을 했습니다.

넷째날, 코끼리쇼와 민속촌구경을 하러갔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코끼리.

공을 차고 넣는 코끼리.

춤을 추는 코끼리.

코끼리 등에 올라타고서  냇물을 거닐고 숲속길을 산책하는 트레킹 등...

그런데 하일라이트는 이거였습니다.

코끼리쇼가 끝날 무렵, 조련사가 관람객들에게 ’<코끼리 맛사지>를 받을 분은 앞으로 나오시라’고 했습니다.

서로 눈치만 볼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순간 ’한 번 해 보자’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갔습니다.

서양친구 한 사람도 나갔습니다.

조련사가 풀밭에 누우라고 했습니다.

하늘을 보고 반듯이 누웠습니다.

겁도 나고 해서 눈을 감았습니다.

조련사가 배위에 두꺼운 천을 깔았습니다.

조련사는 코끼리를 시켜 코로 내 허벅지를 두드리게 했습니다.

제법 세게 두드렸지만 아프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다음에는 코끼리에게 발로 내 배와 다리를 밟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배에서 다리로.

다리에서 배위로.

다리와 배 사이에 있는 중요한 부분도 밟고 두드리면서.

나는 말은 못하고 오금을 저렸습니다.

실수를 해서 ’콱’하고 밟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나중에 들었습니다만 우리집사람과  이회장부부, 차회장부인도 가슴을 조렸다고 했습니다.

어찌나 겁이나던지요.

시종 눈을 감은 체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런데 신통한 것은 코끼리의 발마사지가 세지도 약하지도 않고 시종 같은 강도를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가운데 부위를 밟고 두드리는데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살살 밟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고.


나는 외치는 바입니다.

코끼리 맛사지 받아 본 사람, 있으면 나와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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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100년만의 대설大雪이 내렸다고 온 천지가 법석을 떨었습니다.

뒷산 수리산을 올랐습니다.

산을 내려오다 보니 저 밑에 하얗게 눈이 쌓인 도로 - 산불 진화용 도로 - 가 유난히 내 눈에 들어왔습니다.

문득 ’스키 스로프’를 떠올렸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많이 내려 쌓이는 눈은 앞으로는 보기가 쉽지 않을텐데...

멀리 스키장 가는 것은 운전을 해야 하는데 춥고 미끄러운 길을 운전하여 가는 것은 꿈도 꿀 수가 없고....

더더욱이나 집사람이 가려하지 않으니 나 혼자서는 재미가 없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내려왔습니다.

집에 와서 집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내일 수리산 소방도로에서 스키를 타보겠다’고.

집사람은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침밥을 서둘러 먹고는 수리산 소방도로로 스키 타러 간다고 설쳐대니 집사람이 ’같이 가겠다’고 했습니다.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호기심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따라 나선 것입니다.

옛날 스키장 다닐 때는 잘 몰랐는데 스키와 부츠가 왜 그리 무거웁던지.

약골인 집사람이 거들어 줘서 그래도 힘을 들었습니다.

도로 꼭대기에 도착해서 부츠를 신고 스키에 올랐습니다.

전망대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신기해 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타고 싶어 올라왔건만 막상 출발을 할려니 두려운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산허리를 깍아 만든 소방도로라, 폭이 4~5m정도로 좁고 게다가 한쪽은 낭떠러지이니....

더욱이 눈길을 산책하는 사람들과 산악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앞뒤로 따라오고.

그래도 어쩌나.

이왕 시작한 일이고 더우기 집사람이 이 추운 날씨에도 여기까지 따라와 응원을 하고 있는데.

스르르 미끌어져 내려갔습니다.

괜찮았습니다.

꼬불길에 가끔 경사가 심해 아찔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길폭이 좁고 한 쪽이 낭떠러지이니 위험해서 속도를 낼 수가 없었고

그러자니 자연히 속도를 줄여야 했고 속도를 줄이자니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그동안 체육관에서 꾸준히 연마한 다리근육의 덕을 톡톡히 봤습니다.

약 2 km 정도의 거리를 쉬엄쉬엄 쉬면서 천천히 내려갔습니다.

우리부부는 환호를 했고 주위 사람들도 멋쟁이라면서 부러워하는 눈길을 보내왔습니다.

119구조대원도 아니면서 소방도로에서 스키를 탄 사람이 나말고 또 있을까....


삶이 단조로와 재미가 없을 때, 가끔은 파격破格과 일탈逸脫을 경험해 보는 것도 좋을듯 합니다.

우리는 거기서 색 다른 만족과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201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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