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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56.  핫바지에 고무신 (2020-01-01) | 박영하 | 출처 : - 2019-03-24
 

나는 대학 일학년 때, 핫바지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서울이 추울 것 같아(입학철이 이른 봄이라서.....) 그랬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고무신은 왜 신었었는지?????

구두나 운동화보다, 핫바지에는 고무신이 어울린다고 생각해서였을까?


그때 이야깁니다.

학교엘 갈려면, 청량리에서 버스를 타야 했는데,

20  ~ 30 분 간격으로 버스가 출발했습니다.

그래서 아침 시간이면 버스 한대에 200명이 넘게 탔습니다.

콩나물 시루가 따로 없었습니다.

그런 버스에서 어느 날, 황당한 일이 벌어졌는데......

나는, 그때나 그후에나 담배를 별로 피우지 않은 편인데

버스를 타고 보니 손에 담배가 들려있었습니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비좁은 버스 속에서, 안간힘을 쓰며 손을 비집고 아래로 내려 담뱃불을 껐습니다.

조금 있다 하니, 한쪽 발등이 따끔 따끔했었고, 그래서 다른 쪽 발을 들어올려 따끔거리는 발등을 부볐습니다.

영문을 모른채, 버스는 학교앞 정류장에 도착을 했고.

버스를 내려서 보니 한쪽 양말에 구멍이 뻥 하고 뚫여있었습니다.

고무신을 신고 다녔었는데, 끈 담뱃불이 양말 위에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석산 나이롱 양말은 지금처럼 매끈하지 않고 털북숭이였습니다.

담뱃불이 양말털 위에 떨어져 얹혀 벌어진 해프닝이었습니다.

지금도 웃음이 납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학교 구내 이발소에서 이발을 할 때였습니다.

평소 옷차림이, 위에는 교복, 아래는 핫바지를 입었습니다.

이발을 할려고 윗도리를 벗고 의자에 앉았습니다.

이발사가 앞쪽 거울을 보다가 화들짝 하고 웃었습니다.

난 이발사가 왜 그러는지 몰라 그냥 앉아 있었는데....

이발사가 하는 말을 듣고서야 아하 ~  했습니다.

거울에 비춰진 내 모습, 나도 겸연쩍었습니다.

가슴팍 위로까지 올라 온 바지춤과 허리띠.

내가 봐도 촌스러웠고 웃겼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나는 누님과 함께 부산 동대신동 구덕수원지앞 어느집 문간 셋방을 얻어 자취를 했습니다.

토요일이면 울산집으로 가서, 월요일 새벽에 쌀자루 김칫단지 들고 부산으로 옵니다.

동대신동 구덕운동장앞 전차종점에서 전차를 내려 ,구덕수원지앞 자취방 가는 길.

아침 등교 시간이라, 경남고 부산여고 학생들이 책가방 들고 종종 걸음들을 걷고 있는데

교복 입고 교모 쓴 학생 하나가, 한 손에 쌀자루, 또 한손에 김칫단지를 들고 뒤뚱 뒤뚱 걷는 모습.

쪽 팔리고 가관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땐, 공부는 열심히 했습니다.

사실이지 내가 서울로 올 형편이 못되었는데

내가 대학 진학 때문에 고민하는 것을 아시고는,

친구 어머님께서 서울에 가정교사 자리를 미리 마련해 주셔서 서울로 올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만약 얘가 서울대학교에 붙으면 자네집에 가정교사로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여

내가 서울로 올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신 분이 호명이 어머님이십니다.

그댁 안주인이 경남고녀 동기동창이어서 내가 그집 막내아들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댁에서 운영하는 명동피아노상회는 명동2가 명동공원 바로 앞에 있었고 살림집은 회현동에 있었는데

회현동집에는 애를 가르칠 때만 갔었고 잠은 명동 피아노가게에서 점원들과 한 방에서 잤습니다.

달리 내가 공부할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댁 아들 딸들은 경기고 경기여고 이화여중에 다녔습니다.

핫바지에 고무신을 신고 있는 내가, 그댁 사람들이 보기엔 가관이었을 것입니다.

회현동집 식구들과의 인간적인 갈등.

휘황찬란한 명동의 밤거리.

나는 방황을 했고 그럴 때면 길가 좌판에서 파는 개비 담배를 - 피우지도 못하면서 - 사서 물었습니다.

인간적인 갈등과 좌절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반 년 만에 그집을 나왔습니다.

갈 데가 없었습니다.

학교앞 잔디밭에서 이틀밤을 떨었습니다.

그때가 늦은 가을이었습니다.

두고 두고 아픈 기억으로만 남아있었는데...

지금에야 생각해 보니,

만약에 그댁에서 나를 받아주지않았다면?

내가 과연 서울(대학교)로 올라올 수 있었겠습니까?

못 올라왔다면?

하늘같은 은혜를 모르고 살아 온 내가 부끄럽습니다.


그 당시 명동, 대단했습니다.

유행, 팻션,  환락의 거리였습니다.

부산 광복동 거리도 제대로 못 가 본 촌놈이, 고무신에 핫바지 입고 불빛 찬란한 명동 밤거리에서 살(놀)다니...

촌놈이 아무런 준비 없이, 아무런 생각 없이, 신천지 명동에서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세상 보는 눈이(사람 산다는 것이) 달라져 버렸나 봅니다.

그 이후로 내가 바뀌어져 버렸습니다.

공부와는 멀어졌고.

한 번은 동대문 시장에서  중고 청바지를 사서 맘보바지로 줄여 입었습니다.

나중에야 발견했는데 그 바지는 남자바지가 아니고 여자바지였습니다.

바지앞이 열려있질 않고 막혀있었습니다.

그랬어도 아무도 그런 줄을 몰랐고(윗도리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니까), 버리고 또 살 형편이 아니었으니까.

친구들은 모두 미국으로 유학들을 갔었는데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으니 엄두를 낼 수도 없었고.

그러나 그 사이에 촌티를 벗고 서울놈 뺨 칠 정도로 빤질이가 다 되어

육군 소위 때는 맘보 소위로, 사원 시절엔 <만만하지 않는 놈>으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민물에서 살면 민물장어가 되고, 바다에서 크면 바닷장어가 되는 것 처럼

사람도 자라는 환경에 영향(지배)를 받는 것 같습니다.

민물장어는 민물장어 대로, 바닷장어는 바닷장어 대로 맛 있습니다.

물 탓 않고 물 고마워 하며 살렵니다.


                                       <202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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