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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97.  <그냥보십시오> 나목(裸木)이 되고 싶다 | 박영하 | 출처 : - 2023-11-10 오전 7:36:15
 

아침저녁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쌀쌀하다.

드높고 푸른 하늘, 들길에는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가을의 정취가 무르익고 북쪽 산간지방에서는 벌써 성급하게 무서리가 내렸다는 소식과 함께 단풍소식도 전해지고 있다.


계절은 창변을 통해 온다.

봄에는 겨우내 꽁꽁 닫아두었던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가을엔 여름 내내 활짝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고 구석으로 몰아붙였던 커튼을 내린다.

커튼이 닫힌 서재에 촛불을 밝히고 오랜만에 책상 앞에 다소곳이 앉아 손때 묻은 고서를 편다.

호젓한 나만의 세계가 열린다.


지난여름 흥분된 열기 따라 내 사유(思惟)는 영상과 스포츠에 빼앗기고 멍하니 세월만 보냈다.

이젠 삽상한 가을을 맞아 잃었던 나의 사유를 찾아 나선다.

죽었던 나를 되살린다.


나의 자아는 무엇이며 어디서 찾을 것인가.

우리의 영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홍수처럼 끝없이 밀려오는 지식정보와 세속적 안일과 나태, 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인심이 그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명리와 아집을 버리고 순명의 화두를 강물에 띄우는 일이다.


순명의 화두는 자연밖에 없다.

공맹의 명저를 뒤적이며 철학을 찾고 심오한 종교를 통해 인간의 존재나 행방을 논하는 것은 과분한 욕심이요 외식인지 모른다.

골치가 아프고 답답할 뿐이다.

나를 찾는 데는 한 그루의 나무, 한 송이의 꽃이 있으면 족하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한 자리에 자리 잡고 서 있으면서도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며 그를 통해 많은 의미와 진리를 인간에게 전해주고 있다.


나의 출근길에는 아파트 문을 나오기가 바쁘게 오랜 세월이 정박한 가로수가 즐비하게 서서 나의 출근을 배웅한다.

도로변에는 버드나무, 그 안쪽 인도에는 은행나무 그리고 또 그 안쪽 언덕바지엔 벚꽃나무가 앞을 다투어 얼굴을 내밀고 인사를 한다.

가지와 잎새를 흔들며 반가워한다.

그들의 몸짓은 철 따라 변신한다.

봄에는 새싹, 여름엔 녹음, 가을엔 단풍, 겨울엔 나목으로 계절의 감각을 일깨워준다.


깊어가는 가을, 그들의 몸짓은 애련하면서도 거룩하다.

여름 내내 왕성하던 성장을 멈추고 머지않아 낙엽 될 슬픔에 흐느적거리는 것도 같고 아니면 자신들의 자리를 다음 해의 새싹들에 내어주기 위해 양보의 미덕을 쌓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의 성숙은 흔들림으로써 이루어진다.

미풍에 흔들리고 폭우에 흔들리고 더러는 강풍에 가지가 찢어지고 뿌리째 넘어지기도 한다.

그런 박해와 흔들림이 없으면 땅속에 깊이 뿌리를 박지 못하고 올곧게 무성히 자라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슬픔이 없으면 기쁨이 없고 고뇌가 없으면 즐거움도 없다.

가난이 있기에 부유가 있고 질병이 있기에 건강의 귀중함을 알게 된다.

그것은 태극처럼 순환한다.


나는 요즘 날마다 나무들이 누렇게 단풍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애련함에 잠기다가도 그들의 위대함에 감탄한다.

누가 일러 단풍을 수분과 영양부족으로 죽어가는 병색이라 했던가.

그것은 자기완성이요 내일을 위한 희생의 미덕이다.

여름 내내 온갖 질고를 이기며 녹음과 그늘로 인간을 시원케 해주고 더러는 후대를 위하여 열매와 씨앗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내일의 새싹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며 정작 자신은 부토가 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태양이 서산을 넘어갈 때 마지막 찬란한 빛을 발하는 것처럼 그들도 잔조의 빛을 단풍으로 아름답게 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단풍은 아름답고 위대하다.


나의 출근길에 도열해 있는 은행나무, 버드나무, 벚나무, 그중에서 은행나무 잎이 제일 먼저 단풍 들 것이다.

은행잎이 한꺼번에 노랗게 물들어 있는 모습은 금관을 줄 세워 놓은 것처럼 아름답고 한줄기 비바람에 찻길과 도로에 뿌려지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깃을 스치면 황금색 축제장이 된다.

갓 떨어진 잎새들은 아직 샛노란 신선함이 감돌며 옛 새악시들이 예쁘게 머리 단장하던 비녀장같이 아름답다.

아니면 어질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하늘에서 내리는 황금조각이라 할까?

사랑의 비밀을 간직한 엽서 같기도 하고 천사들이 인간을 위해 추는 군무 같기도 하다.


단풍은 나목의 예비향연이다.

머지않아 만산홍엽이 다 떨어지고 쓸쓸한 산천엔 나목만이 우뚝 서서 겨울 찬바람에 가지만 휘휘 날릴 것이다.

온갖 잎새들이 다 떨어져 버린 나목, 그것은 청산이요 비움이다.

우리 인간들도 나목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잘못 살아온 인생을 가을에 한 번씩 낙엽으로 청산하고 새봄이 오면 다시 시작하는 재생의 기회를 가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실수와 불행으로 얼룩진 인생은 비록 눈보라 치는 겨울의 피나는 인고를 치르더라도 다시 인생의 새싹을 피우고 재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기꺼이 기다리는 나목이고 싶다.


나를 찾는 길은 그들의 섭리를 배우는 것이다.

나를 비우고 죽이며 양보와 희생의 미덕을 쌓는 것이다.

깊어가는 이 가을 그리움의 빈 잔에 사랑의 열매를 채우기 위하여 조용히 두 손을 모은다.


                                              강석호 / 한국수필문학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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